
| 내외경제TV=정동진 기자 | 슬로 호시스(Slow Horses)는 영국 MI5에서 실패한 이들이 모여서 각종 임무를 해결하는 첩보 드라마다. 믹 헤론의 소설 '슬로 호시스'와 같은 이름의 드라마로 배우들의 연기로 분한 MI5 요원들의 각종 암투와 음모 등이 얽히면서 드러나는 정치 드라마의 성격도 강하다.
특히 영국 드라마 특유의 잿빛 화면과 기분이 가라앉는 색감이 어우러지면서 묘한 시즌 1부터 묘한 흡인력을 앞세운다. 실패로 분류된 요원들이 모인 슬라우 하우스는 패잔병의 이미지가 강한 것처럼 묘사되나 실질적으로 '느린 말'만 투입되는 특별한 임무의 성격이 강한 탓에 내부 감시자나 외부 해결사의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1화부터 공항 폭탄 테러 용의자를 놓쳐 요원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카트라이트와 쓰레기를 찾아내서 분리수거(?)에 나선 카트라이트를 지켜보는 잭슨 램(배우 게리 올드만)의 대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시즌제 드라마임에도 시즌을 관통하는 주제와 별도로 등장하는 회차마다 '한 편의 영화'처럼 기승전결이 명확, 한 번 보게 되면 공개된 시즌을 모두 볼 수밖에 없어 무서운 몰입력을 가진 드라마이기도 하다.


물론 각종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이음새와 사건의 연결고리는 시즌 곳곳에 떡밥처럼 배치, 시즌 말미마다 이를 회수하는 이벤트를 활용해서 '다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슬로 호시스는 일반적인 첩보 스릴러 드라마와 궤가 다른 편이다. 미남이나 만능 요원, 첨단 장비보다 사건을 대하는 요원의 심리전과 그들의 심리 변화가 주류를 이룬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첩보국 본진(?)에 입성하기를 바랐던 아들이 업계의 전설 '잭슨 램' 옆에서 묵묵히 성장하는 것만 지켜본다.


시작부터 카트라이트의 불평과 불만이 쏟아지지만, 결국 슬라우 하우스에 배치된 실패한 요원들조차 카트라이트의 감시조에서 진정한 팀원으로 거듭나는 게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대사나 행동에서 보인다.
슬라우 하우스의 지부장이자 집주인 잭슨 램의 무덤덤한 표정에서 요원을 향해 내뱉는 독설 이면에는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없다'라는 지부장의 애틋한 감정이 풍긴다.
등장하는 배역들조차 전문가의 기질보다는 실수 한 번으로 경력을 위협받는 지경에 몰려 초반에는 워라밸에 집중하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지부장이 책상을 떠나 행동에 옮길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명령을 무시하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작전에 투입, 서로 필요한 원팀이 되어가면서도 잭슨 램은 끝까지 칭찬 한마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나설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것만 은연중에 강조, 신경질만 내던 캐릭터의 비밀과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가 슬라우 하우스로 오게 된 배경을 알게 됐을 때 모든 실마리가 풀린다.
그래서 처음에는 구멍 난 양발을 책상에 올리고, 의자에 기대어 툭툭 내뱉는 냉소적인 한마디는 곧 이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하다.
무심코 내뱉는 싱거운 농담과 임무 도중에 사망한 요원의 이름을 기억하고, 위로를 건네는 지부장의 모습에서 겉과 속이 다른 꼰대의 모습이 투영돼 드라마의 재미와 때로는 인생 선배의 해학까지 엿볼 수 있는 슬로 호시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