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시간 속의 도시여행 ‘펭귄마을’

▲사진제공=광주시청

[내외경제TV 칼럼]도시는 언제나 높음과 화려함과 세련됨을 뽐낸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빌딩, 온갖 휘황한 불빛이 감도는 거리, 잘 차려입고 활보하는 매끈하게 가다듬은 시민, 이 세 가지 요소가 중심을 이루는 곳,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하지만 거대한 제국을 만든 역사도 그 시원을 따라가면 작고 보잘 것 없듯, 화려한 도시일지라도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낡고 허름한 곳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 굳이 2백 년 전 산업혁명 시기 오물과 하수가 넘쳐 땟국물 줄줄 흐르던 런던 거리의 풍경을 떠올릴 것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우리나라 도시의 뒷골목은 남루하고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이제는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몽땅 사라져 우리의 기억 속에 가물가물 그 잔영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말이다. 한데 세련된 도시에 옛 도시의 원형이 용케 살아남아 사람의 발길을 불러 모으는 곳이 있다. 바로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안에 있는 '펭귄마을'이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손을 맞잡는 의미 있는 곳
지난 120년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광주근대문화의 보고(寶庫) 양림동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 요즘, 양림동 안에 있는 펭귄마을이 덩달아 광주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펭귄마을은 과거 양림동에 살던 주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달동네 같은 곳인데, 마을의 원형을 독특하게 그것도 아주 독특하게 보존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인기장소로 탈바꿈시켰다.

무엇보다 펭귄마을에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과거에 쓰던 낡은 물건, 즉 잡동사니다. 이곳에 가면 한 개인이나 가정에서 한 때 아낌을 받았을 수많은 물건들이 어느 시간에 멈춘 채 골목에 나와 있다.

그것은 쪼그라진 음료수캔, 닳아빠진 신발, 지휘자 카라얀의 사진이 든 빛바랜 액자, 칠이 벗겨지고 소리도 나지 않는 건반만 남은 오르간, 줄 끊어진 기타. 낱알을 털던 녹슨 홀태, 옛 흑백 TV 브라운관, 바늘이 멈춰버린 시계, 이발소풍 그림 등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차다.

당장 쓰레기로 버려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들이 골목의 벽에 걸리거나 혹은 좌판에 진열돼 우리를 맞는다. 그러니까 펭귄마을은 펭귄은 커녕 근사한 펭귄조형물 하나 없이 보잘 것 없는 물건만 가득 찬 곳인데도 사시사철, 주야불문하고 전국에서 사람이 모이는 참으로 이상한 동네인 것이다.

이미 전국에 알려진 유명한 동네답게 이곳엔 언제나 가족 혹은 연인, 친구끼리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사람들로 붐빈다. 이들은 모두 밝고 환한 미소를 머금고 신기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잡동사니들에게 눈길을 주고 말을 건넨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군색한 골목을 배경삼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밝고 환한 현재의 모습을 옹색한 시대를 배경으로 비춰보고 있는 것이다.

펭귄마을의 숨은 매력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다. 즉 과거와 현재가 거리낌 없이 공존하면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을 생생한 일상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곳, 그래서 우리에게 노스텔지어 감회에 빨려들게 하는 곳, 펭귄마을이야말로 예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를 동시에 불러내 과거와 현재는 절대 분리될 수 없고,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일깨워주는 의미 있는 장소다.

멈춘 시간 속에서 고유한 가치가 빛나는 펭귄마을
펭귄마을을 처음 가꾸기 시작한 사람은 이 마을 촌장인 김동균(64)씨다. 이곳 토박이인 그는 약 4년 전 누군가 내다버린 시계가 아까워 재미삼아 골목에 걸었다. 그랬더니 아주 근사했단다.

이를 계기로 동네를 문화쉼터로 만들자고 마음먹고 재미나고 위트 넘치는 문구를 궁리해 벽에 쓰고 금속성 쓰레기를 모아 정성껏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인터넷을 타고 전국각지로 퍼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펭귄마을은 삽시간에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현재 골목마다 벽에 걸린 기기묘묘한 각종 물고기 모양의 장식품을 비롯해 벽에 그린 그림과 글씨 등은 대부분 그의 솜씨다. 요즘 이런 작품을 일컬어 정크아트(Junk Art)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고 많은 이름 중 왜 펭귄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는 동네 주민의 모습에서 착안했는데, 사람을 놀리자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다리를 저는 것을 슬퍼하거나 측은하게 여기지 말고 보다 해학적으로 바라보자는 의도였단다.

하긴 누구라도 나이를 먹으면 사람의 발걸음은 펭귄처럼 뒤뚱거릴테니, 마을 이름에 해학과 철학을 담은 동네 사람들의 지혜가 참으로 놀랍다.

펭귄마을을 돌아보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지만 다양한 볼거리가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오래 붙드는 것은 각양각색의 수많은 시계들이다. 그런데 이곳의 시계는 모두 운동이 정지된 고장난 것들인데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만약 살아 작동하는 시계라면 모두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획일적 모양을 하고 있을 테지만, 정지된 시계들은 저마다 자유로운 시간에 멈춰 존재의 유일함을 드러내고 있어서다.

뿐만 아니라 고장난 시계들은 마치 이곳이 어느 순간 진행을 멈춤으로써 도시의 개성을 창출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아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재개발이란 세상의 시계에 따르기보다 낡은 갈대처럼 쇠락한 동네일지라도 지키고 가꾸는 자기들만의 시계에 맞춘 삶을 살기에 우리에게 독특한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펭귄마을에서만 무려 60년을 살았다는 김향순(73)할머니의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집값 땅값 오르는 거 다 관심 없고, 사람 많이 찾아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동네란다.

펭귄마을의 멈춘 시간 속에선 도시의 화려함 속에 박제된, 남루했지만 훈훈하던 옛 기억들이 날마다 날개를 달고 나와 펭귄처럼 뒤뚱뒤뚱 춤춘다. 비록 그 춤이 예쁘고 세련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그것에 매료돼 이곳을 찾아온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손민두

코레일 KTX기장.

2004년 4월 1일 KTX개통 첫날 첫 KTX운행.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편집기자. KTX매거진에 기차와 인문학이 만나는 칼럼 기차이야기 3년간 연재.

현재 '광주인'신문에 '기차별곡'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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