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칼럼-손민두] 빙월당(氷月堂) 처마 위로 낮달이 떴네!
[여행 칼럼-손민두] 빙월당(氷月堂) 처마 위로 낮달이 떴네!
  • 손민두
  • 승인 2018.01.3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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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문화의 산실 월봉서원에서 만나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빙월당 (사진제공=광주광역시청)

[내외경제TV 칼럼] 대개 우리나라 큰길엔 주로 위인들의 호나 이름을 붙인다. 충무로는 충무공 이순신, 퇴계로는 퇴계 이황, 세종로는 세종대왕의 묘호를 따다 붙였다.

조선 전기 정치·사상가인 고봉 기대승(1527~1572)도 광주도심지 도로에 그 이름 한 자락을 올렸다. 광산구 흑석동 네거리부터 월봉서원에 이르는 약 11Km의 도로가 그의 호를 딴 고봉로다. 그가 남긴 학문적 성과나 덕행으로 봤을 때 수도 서울 한복판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점은 항상 아쉽다.

대신 월봉서원을 가려면 반드시 고봉로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자. 그만큼 고봉의 심오한 학문과 선지자적 삶을 제대로 보려면 길을 가는 순간만이라도 선행학습이 필요하단 의미 아닐까? 고봉로를 따라 임곡동을 지나면 호남선 철도가 길옆에 따라 붙는다. 잠시 철길과 나란히 달리다 철길 밑으로 가로지른 지하차도를 건너 조금 더 가면 고봉선생을 모신 월봉서원이 나타난다.

고봉의 서릿발 같은 기상이 서린 빙월당

혹독한 겨울을 나는 산천과 초목은 숨죽인 듯 고요하고 쓸쓸하다. 예스런 고샅길을 따라 서원 앞에 이르니 고봉의 서릿발 같은 기상과 꿋꿋한 절개 때문인지 모든 게 얼어붙어 미동도 하지 않은 느낌이다.

서원은 강당인 빙월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들어섰고, 그 위로 내삼문인 정안문을 지나면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가 나온다. 예의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모범답안을 따랐다. 그런데 월봉서원은 빙월당과 장판각 두 동의 건물만 광주시지정문화제로 등록됐을 뿐, 안동의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처럼 역사·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서원 건축물이 모두 최근에 지어졌기 때문인데, 따지고 보면 고봉의 신산한 삶을 닮은 월봉서원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관계가 있다.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 만인 1578년, 호남 유생들이 지금의 신룡동 낙암 아래에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그 후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지금의 산월동 동천으로 옮기고 나서 효종으로부터 월봉이란 이름을 사액(賜額)받아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 시기인 1868년 전국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았다. 그 후 1941년 그를 기리는 후학들에 의해 다시 현재 위치로 옮겨 빙월당이 지어지고, 198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됐다.

그러니까 월봉서원은 조선 후기 혹독한 전란과 정치적 풍상을 겪고 장소를 옮겨가며 어렵사리 그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원 경내에서 고봉의 흔적을 찾을 목적인 탐방객은 으레 실망하기 일쑤다.

하지만 문화재 탐방의 목적이 유형의 자산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무형의 정신을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텅 빈 빙월당 뜰 안에서도 안빈낙도를 추구하며 경국제세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선생의 마음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마침 빙월당 처마 끝 바다처럼 푸른 하늘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낮달이 떠오른다. 빙월당이 제 이름에 값하는 순간이다. 개혁군주 정조 임금은 고봉의 학덕과 인품을 숭앙하며 빙심설월(氷心雪月)이란 휘호를 내렸다. 선생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 눈 위에 비치는 달빛과 같다는 뜻인데, 서원의 강당 빙월당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데 이것은 고봉이 세상을 떠난 200년 후의 일이다.

당대 사람들은 미리 뜬 낮달의 밝음을 알아채지 못하듯 그의 경륜과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재기와 패기로 뭉친 소장학자 정도로만 인식했을 뿐.

해와 함께 뜬 달은 빛나지 않는다

고봉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다.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신출내기 선비 고봉은 성리학으로 일가를 이룬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와 사상논쟁으로 맞짱을 뜬다. 이때 두 사람의 나이차는 무려 스물여섯, 웬만한 내공이 없고서야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고봉은 이미 주자대전 백여 권을 섭렵한 패기만만한 선비였다.

토론의 주제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사단칠정론'이란 성리학의 인성론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 즉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한 것인데 퇴계는 주자의 학설에 따라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봉은 여기에 문제제기를 했다. '인의예지'도 실은 '희로애락애오욕'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인데 어떻게 사단과 칠정이 따로 일 수 있느냐는 거였다. 고봉과 퇴계는 이 문제로 장장 8년에 걸친 왕복서한을 통해 끝없는 논쟁을 이어갔다. 결국 고봉의 깊은 통찰과 식견은 퇴계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침내 퇴계가 고봉의 사려 깊은 연구를 받아들여 기존주장을 수정해 사단과 칠정은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퇴계는 고봉과의 토론을 통해 유학의 이론보완의 역사에 동참하게 됐다. 즉 주자보다 더 진보된 학설을 내놓음으로써 동양 철학사에 퇴계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된 것이다.

고봉과 퇴계가 벌인 사상논쟁은 그 논쟁의 결과는 물론 논쟁의 방식과 태도에도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요즘 들어 거친 언어가 오가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치열하면서도 차분하고, 날카로웠지만 정중한 토론을 이어갔던 두 석학의 인간됨은 후대의 귀감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퇴계를 동양 최고의 사상가로 우뚝 서게 한 일등공신은 바로 고봉 기대승이란 점이다. 제 아무리 퇴계라도 고봉과의 치열한 토론이 없었다면 퇴계의 학문적 성취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퇴계는 알아도 고봉은 잘 모른다. 태양과 함께 뜬 달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고봉은 바로 그런 존재다. 아까 빙월당 처마 끝에 있던 달이 어느새 중천에 떴다. 한데 달은 더 외롭고 하늘은 여전히 차갑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손민두

코레일 기장

KTX 무사고 200백만 킬로미터 달성.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 편집기자.

'KTX매거진'에 기차와 인문학이 만나는 칼럼 '기차이야기' 3년간 연재.

현재 '광주인'에 '기차별곡' 연재 중.




손민두 nbntv@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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