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나는 무신론자인데 여성 쪽(남성 쪽)이 원해서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 저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 않지만 친구가 가니까 나도 간다. 이웃여인이 사니까 나도 산다. 전쟁에 반대하며 민족 간의 증오를 비난하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는 분노한다.

생각해보면 이런 예는 무척 많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서, 혹은 나 한사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는 자포자기,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당할까 하는 우려, 타인의 시선 등등을 고려해서 우리는 매순간 타협하며 산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가르친다.

뾰쪽한 정이 돌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 간다. 나대지 마라. 너를 검열하고 너를 억압하고 조용히 체제와 조직의 틀에 맞춰서 살아라. 체제의 부품이 되고 성실한 나사가 돼라. 그래야 사는 것이 편해진다.

니체는, 다른 견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행하는 관습'을 따라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정신과 행위의 이런 불일치를 니체는 '조야한 편견이며 조야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아침놀, 149'

사회적 관습이나 다수의 힘과 직면했을 때, 자신의 통찰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관용적인 태도라고 덧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또는 이건 틀렸지만 나는 따를 거야.

매우 다른 통찰을 하고 있으나 정신에만 머무는 것에 자족하는 사람들은 오늘 여기 무수하다.

니체는 경고한다. 행동하라고. '사회적 관습에서 이탈된 작은 행위'들이 필요하다고.

'정신적인 자유는 온전히 보존하면서 실행에서는 관습에 굴복하는 행위', 이 행위를 극복해야 새로운 미래를 만날 수 있다.

특히 그가 명망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저 사람도 저렇게 하는데 뭐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작고 소소한 실천들이 가치 있다는 것이다.

쉽지는 않다.

예컨대 나는 독신주의자다.

그런데 그런 나를 주위에서 가련하게 본다. 부모님은 나만 보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절망하신다. 나는 지금 이대로 좋은데 친구들은 하나 둘 결혼을 한다. 이제 나만 남았다! 어떻게 할까?

마침 괜찮은 사람도 만났다.

에이 결혼해버리자! 이렇게 된다. 괜찮은 사람이 없으면 괜찮을 사람을 찾으려고 애쓰게 된다. 항상 내 주변의 눈이 문제다. 관습이 문제다. 사회 시스템이 문제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거듭 말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나는 내 삶과 내 사고와 정신의 주인이다!

작고 소소한 통찰을 행위로 연결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정신의 분방함'은 거기 머물러 있고 나의 행위는 사회적 통제 시스템 속에서 헉헉거리며 트랙을 돌고 있다면 슬픈 일이다.

해서 정신과 행위의 일치, 앎과 실천이 항상 어려운 문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잘 안 된다. 사소하고 작은 반 관습적인 행위들을 행할 때 우리는 어떤 새로운 가치를 향해 나가는 첫걸음을 뗀 것이다.

작은 것부터 해보자!

매우 하찮은 반 관습적 행위 해보기. 소소한 일탈. 무엇이 있을까? 물론 그것이 내 견해이어야 한다!

관습과 사회와 이웃과 두려움과 삶과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완전히 바퀴'가 되거나 '이 바퀴들 아래에 깔려버리게 되는 체제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길에서 탈주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관습에서 '탈선하는' 작은 행위들이 필요하다.

니체는 말한다.

"삶과 사회에 대해 무수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침놀,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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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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