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이른 아침, 아이를 학교에 태워다 주고 산으로 향한다.

부드러운 안개, 밤새 살풋이 내린 비로 청정한 공기를 머금은 하늘, 골목과 골목을 돌아 나오면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더러 무표정하고, 더러 바쁘게 종종걸음 친다. 한껏 멋 부린 예쁜 처녀들을 훔쳐보면서 그리움에 대해 생각한다. 문득 지금 이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본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힘이 솟는다. 삶의 의지 같은 것이. 지금까지의 나를 잊고 새로운 생성 중인 나를 바라보면 이 삶을 긍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 삶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다. 나는 웃는다. 인생은 농담 같은 것, 삶은 유머가 필요하다. 엑셀레이터를 힘 있게 밟는다. 차는 시속 100km의 속력으로 달리고 알 수 없는 곳에서 생겨나는 힘을 느낀다. 그것은 무지개 같은 것, 모락모락 새로운 내가 탄생 중이다. 속도를 낮추고 창 밖을 본다. 신도시 아파트 숲을 금세 벗어나 한적한 논두렁 밭두렁을 달리고 있는 나는 나의 선생이며 나의 미래, 나의 기쁨이다. 오늘은 내 맘대로 생각하려고 한다.

방금 도착한 등산로 입구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입산을 준비한다. 주차 후 나도 산으로 들어선다.

니체는 자연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고 그저 낭비할 뿐이라고 했던가. 인간세상 역시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다며 인간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괴로울 것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좋다! 좋지 않은데 좋은 척 꾸며서 생각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리!

오늘은 조금 들뜬다. 이유는 없다. 살다보면 더 기운이 나는 날이 있고 더 우울한 날이 있을 뿐이다. 나는 청솔모처럼 빠르게 산길로 들어선다. 더러 뛰기도 하고, 흐느적 흐느적 걷기도 하고, 운동기구에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바라본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쨍, 하게 푸르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응시하다가 일어난다. 어서 집에 가야지. 오늘 할 일들이 떠오르고 그 일이 내게 있음이 기쁘다고 느낀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어야지. 콧노래를 부른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린다. 그 벨소리에 묻는 냄새의 결이 와락, 전해진다. 휴대폰 안의 목소리는 반갑지 않은 사연들을 전해준다. 주저앉고 싶어진다. 그닥 대단한 문제도 아닌데 말이다.

일상의 처리해야 할 일, 달갑지 않는 소식이나 사소한 분쟁에 휘말린 사건, 작은 걱정거리들이라도 이것들의 출연은 나를 저 아래로 밀어 넣는다. 끙끙거린다.

그러다가 별 일 아닌데 뭐! 까짓것 빨리 처리하면 되지. 조금만 수고하면 되지 등등. 사소한 일들을 해결할 열쇠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일을 깨끗이 끝내기 전까지는 좀 전의 설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하루일과는 헝클어지고 만다. 건강하지 못한 인간의 한 단면이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일상을 흐트러짐 없이 수행하는 힘, 그것이 위대한 인간의 능력이 아닐까? 골치 아픈 일이 생길수록 하던 일을 계속하는 뒷심이 필요하리.

전전긍긍 소진해버린 하루가 쌓일 때마다 마음 언저리는 골병이 든다.

연암 박지원 관련 책에서 본 대목인 듯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어떤 선비가 한양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니면 매우 위독하다는) 이 선비는 공부에 몰두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한다. 그때 친구가 말한다. 지금이 공부하기 가장 좋은 때라고. 아이가 아프든, 위독하든, 천리 멀리 있는 아비가 무엇을 할 수 있으리. 바로 이 시간이 허둥대지 말고 진득하니 공부하기 좋은 시간이라는 말이 꽤나 충격적으로 와 닿았다.

그렇구나. 어려움이 닥칠수록 평상심을 잃지 말아야겠다.

가을!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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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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