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여름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이면 장터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유행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소리에 아이들은 장터로 뛰어갑니다. 장터에서는 동네 청년들이 땀을 흘리며 땅을 파서 말뚝을 묻어 포장을 치고 있습니다.


면 소재지 장터에 '가설극장'이 온 날입니다. 모내기를 끝낸 6월 쯤이나, 가을걷이를 끝낼 즈음이면 찾아오는 가설극장은 극장이 없는 면 소재지에서 상영을 합니다. 유행가 소리가 끊어지면 안내 방송이 흘러나옵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학산면민들에게 알려 드립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안내 방송은 저녁에 상영이 될 영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를 알려 줍니다. 이를테면 "당대 최고의 배우 김진규가 출연하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불꽃 같은 연정을 숨겨야 하는 어머니의 모정이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오늘 밤 가족동반 왕림하시어 감상하시라…" 는 식으로 홍보를 합니다.


면 소재지를 괜히 들썩이게 만드는 축제 같은 날이지만 입장료는 만만치 않습니다. 대인 30원, 소인 15원이라는 입장료는 홍보방송에서 필수입니다. 1960년대 10원 가치는 설날 세뱃돈으로 줄 수 있는 돈입니다. 라면 한 개 가격이고, 읍내까지 가는 버스비가 15원이었으니 30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밤이 되면 멀리는 20리 길을 걸어서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땅바닥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면 대한뉴스라는 자막과 함께 태극기가 펄럭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필름 상태가 좋지 않아서 스크린에는 빗살무늬가 그려지거나, 심할 때는 필름이 타버리는 장면이 그대로 노출이 되기도 합니다. 필름이 끊어져 암전이 되면 여기저기서 불평하는 목소리가 포장 밖에까지 새어 나갑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포장이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 장면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도 합니다.


가끔은 '공보실 영화'라 부르는 무료영화가 상영되기도 합니다. 군청 공보실 소속 영사기사들은 지서장을 비롯하여 면장이며 우체국장 등 동네 유지들과 저녁을 먹으며 날이 어두워지기 기다립니다.


그 사이에 집에서 멍석을 지게에 지고 오거나, 가마니 등을 땅바닥에 깔아 놓고 부채질을 하며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립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를 상영하는 날이었습니다.


주인공 윤복이가 국수를 사 들고 집으로 가다가 동네 건달들에게 얻어맞는 통에 국수가 진흙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윤복이가 울면서 국수를 줍는 장면에 여기저기서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처음에는 소리 죽여 울던 아주머니들도 나중에는 치맛말기로 눈물을 닦으며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제 옆에는 아이들에게 무섭기로 소문이 난 차돌영감이 앉아 계셨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생기신 차돌영감은 자기 집 담 밖에 떨어진 홍시를 주워가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디까지든 따라와서 호통을 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스크린을 보지 않고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여서 가만히 살폈더니 소리 없이 울고 계셨습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턱에서 떨어지면 잔기침을 하시며 슬쩍슬쩍 닦아 내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차돌영감의 눈물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얼굴에서는 회초리를 들고 아이들을 따라가다 지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요즈음도 가끔 둔치에서 무료영화를 상영합니다. 군청 문화홍보과 주최가 아니고 라이온스클럽 같은 사회봉사단체가 주최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관람하는 환경은 좋아졌습니다. 별이 총총히 떠 있는 하늘 밑에 의자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필름도 좋아서 스크린에 빗살무늬가 생겨나거나 끊어지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전하고 같은 낭만이나 감동은 없습니다. 낭만이나 감동이 없는 만큼 관객들도 많지가 않습니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면 무의식 중에 주인공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인공이 고통스러워하면 같이 고통스러워하고,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면 같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몇 해 전에 '7번 방의 선물'이라는 영화가 관객 천이백팔십만여 명을 동원했습니다. 실화를 패러디한 '7번 방의 선물'은 딸이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변호사가 되어, 재심 재판에서 억울함을 풀어 줍니다.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아직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며 갈채를 보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돌영감이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이유도 영화의 주인공 윤복이를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합니다. 요즈음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영화는 갱스터나, 폴리스 스토리 영화입니다. 갱스터나, 폴리스 스토리가 관객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정의는 살아 있다" 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씁쓰름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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