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시조의 재해석' 시리즈 1, 2에 이은 3번째 글입니다. 당시 양사언, 이방원, 정몽주(이상 2015, 9. 21), 임제, 한우(이상 2015. 10. 14)'의 시조를 다루었죠. 이번엔 남구만, 이순신, 남이, 황진이 차례입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N포세대(N抛世代)' 젊은이들의 직설적 언어로 패러디합니다. 작품의 주제와 핵심에 직진하는 비문학적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문학의 본질이 우회하는 것이어서요. 어쨌거나 그냥 한번 웃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웃픈(우스우면서 슬픈)' 것은 웬일인가요?

#07.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시조예요. 경세치국(經世治國)에 대한 염려와 경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로도 읽히지만, 농촌의 아침 정경을 여유 있게 표현해 운치와 멋을 살린 대표적인 권농가(勸農歌)입니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군요. 근데 요즘 누가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나요? 대충 기계로 하지. 또 무슨 소 울음소리 하며, '노고지리'는 어른들 고스톱 용어 아닌가요? 위 내용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간추리면, "얘, 알바 안 가니?"

#08.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p4p(Pound for Pound), 그러니까 역대 우리나라 위인 중 서열 1위인 충무공 이순신(1545년~1598년)이 임진왜란 때 한산도(경남 통영) 제승당에 주둔을 하면서 지은 시조입니다. 풍류인으로서의 애잔한 모습이 얼핏 엿보이는 가운데 나라를 근심하는 이순신 장군의 충정과 기상, 고뇌에 찬 조국애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 시조 역시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더 쓰다'고 믿는 흙수저 젊은이들의 공감과 호응은 그다지 얻지 못할 듯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그러게 왜 높은 데는 올라가서 고생을?"

#09.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이십대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남이(南怡) 장군(1441~1468)의 <북정가(北征歌)>입니다.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467(세조13)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른 청년 장군의 웅지(雄志)가 읽힙니다. 하지만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의 영특함을 견제하던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 등이 역모로 밀고해 28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요. 이 시조를 대하는 젊은 그들의 소회는? "그래 너 잘났다!"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 남 잘 되는 꼴 못 본다니까요.

분위기가 무겁게 흐른 듯하군요. 보통 사람들에게야 '난닝구 찢고 놀 날'이야 오겠냐만 19금(禁)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정조를 바꿉니다. 낭만을 위하여!

#10.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벽계수(碧溪水, 1508년~?)는 거문고에 능하고 호방하여 풍류를 즐겼지만 절조가 굳다고 알려졌어요. 벽계수가 송악의 가을 밤 경치를 완상하며 나귀를 타고 가던 중 월하미인(月下美人) 황진이가 나타나 고삐를 잡은 채 읊었다고 전해오는 시조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그러자 벽계수는 노래에 취해 나귀에서 떨어졌고 심히 부끄러워하였다는 로맨틱 에피소드가 담겨 있지요. 하지만 오늘날 진정한 풍류객이 어디 있으며 시가를 읊조리는 예인(藝人) 또한 어드메 있으리오? 노래바에서 일하는 직업여성이라면 이렇게 채근할 것입니다. "계산은 하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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