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올해도 5월의 마지막 날이 되니 독일 니더작센 주의 하노버 남쪽에 자리한 두더슈타트(Duderstadt)가 생각납니다. 참 작고 아름다운 옛날 도시인데, 필자에게는 가족과의 재회를 기다리던 아픔을 간직한 추억의 곳입니다.

1980년대 초 서독(통일 전이었으니 이렇게 부름)에 유학을 갔습니다. 서울 자유센터에서 안보교육을 마쳐야,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안보교육 때 들은 말 중에서 "북구에 여행 갔던 모 여고 교사가 납북되어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 각자가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며, 유학생이 주의해야 할 내용을 하나하나 강조했습니다.

난생처음 해외로 출발하던 날, 김포공항으로 아내와 형님들께서 전송을 나왔습니다. 대한항공 보잉기는 앵커리지를 경유, 파리로 날아갔습니다. 비행기 뒤쪽은 칸막이를 쳐서 화물을 싣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프랑스와 항공협정을 맺으며 승객 수까지도 제한을 두는 바람에 여유 공간에 짐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루프트한자 여객기로 갈아타고 서독 프랑크푸르트에, 그리고 기차로 괴팅겐에 갔습니다. 루프트한자 여객기에서 맛좋은 치즈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처음이라 익숙지 못한 냄새에 걷어내고 먹었더니 옆의 승객이 이상한 듯 쳐다봤습니다.

도착 다음 날부터 대학교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숙소를 구하지 못해 친구의 좁은 방에 끼어서 석 달 넘게 지냈습니다. 어렵사리 방을 구하고, 아내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비자가 주한서독대사관에 도착하지 않아 가족과 합류할 계획이 자꾸 늦어졌습니다.
괴팅겐 시청에서 보냈다는데도, 아내는 주한서독대사관에 갔다 와서는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전했습니다. 별의별 생각을 다했지요. 속만 탔습니다.

그때 5월 말에 친구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가본 곳이 '두더슈타트'였습니다. 괴팅겐에서 40㎞ 떨어진, 인구 2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곳인데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수많은 도시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전화(戰禍)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언론이 이곳을 '니더작센 주의 진주'라 부를 만큼 가옥들이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에 각종 문양과 조각으로 멋지게 꾸며졌습니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기독교가 신·구교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할 때 빚어진 전쟁 흔적도 보였습니다. 성벽을 드나드는 작은 문은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차량이 통과할 때마다 1대씩 교차로 통행하는 등 불편이 많았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것이 역사의 흔적이라면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역사 이야기보다는 동서독의 경계 도시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경계선에 있는 출입사무소는 양쪽이 정말 대조적이었습니다. 서독 쪽에는 파출소처럼 작은 건물에 경찰차 한 대가, 실내에는 경찰 서너 명이 있었을 뿐입니다. 동독에는 커다란 건물과 군인 여러 명이 곳곳에 세워진 높은 망루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서독 쪽에는 도로에 장애물이 없었고, 동독에는 장애물이 눈에 보이기만도 서너 개가 되었습니다. 서독 쪽에서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군인이 아닌 경찰이 경계 지역에 배치됐고, 동독 쪽은 충돌하면 전쟁한다는 각오를 보이듯 군인이 경계를 섰습니다.

그곳을 통과했던 사람들에게 들으니, 안쪽에 동서독 경계에 있는 것과 똑같은 철책이 하나 더 있었다고 했습니다.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이 경계를 넘어 서독에 도착했다고 착각하게 하는 역할을 한 장벽입니다. 이를 두고 통일 후 비열한, 비인도적 처사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경계 사무소 근처 동독 땅의 장미 가지가 서쪽으로 넘어와 꽃이 피었습니다. 서독 사람들은 철책을 잡고 그 꽃의 향기를 맡았는데, 동독 병사들은 이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봤습니다.

또 서독 쪽 '여기가 경계'라고 알리는 표지판에 "독일은 서독보다 더 크다"는 낙서가 있었습니다. 당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만을 보아온 필자에게 두더슈타트의 모습은 평화 자체였습니다. 가족을 기다리던 복잡한 마음을 잠시나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새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핵무기 걱정 없이, 남북 경계선에서는 두더슈타트처럼 좀 더 유연하게, 그리고 지뢰도 중화기도 모두 치워지고 통일을 위한 준비가 서서히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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