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1653년 8월 제주도 서귀포 해안에 표착(漂着)한 하멜 일행 생존자 36명 중 13년 후 조선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8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쳐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지만 하멜만은 바타비아에 남습니다. 그는 난파 선원들의 밀린 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머물면서 난파 후 조선에서 겪은 일을 일지(日誌) 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이 일지는 동료들을 통해 본국에서 출판이 됩니다.

하멜표류기로 불리는 이 일지와 그 부록으로 조선에 대한 다방면의 관찰을 간략하게 기술한 것이 당시 조선에 대한 서양인 최초의 기록이란 점에서 하멜의 일지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멜 자신은 그사이 일본을 통해 추가로 조선에서 인도된 동료들과 함께 5년 뒤 본국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이미 불, 독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된 표류기로 인해 그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멜의 고향은 호르쿰(Gorinchem)이란 곳으로 암스테르담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아주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지금 호르쿰 시는 한국의 서귀포 외에 강진과도 자매도시로 결연하여 서로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강진은 당시 전라좌수영이 있던 곳으로 하멜 일행이 한양에서 쫓겨와 병영에 배치되어 오래 머물던 곳이며 서귀포처럼 하멜기념관이 세워져 있기도 합니다. 2015년에는 호르쿰 시에도 하멜하우스(Hamelhuis)가 건립되어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하니 350년 전의 우연한 인연이 지금에 와 더욱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재작년에 서귀포 시장이 호르쿰 시를 방문하는 기회에 저는 2012년에 출간된 소설 하멜(김영희 작)을 그곳 시장에게 전해주도록 조언을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4세기 전 하멜이 표류해온 사건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그 나라에 알려서 상호 교류와 이해를 넓힐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전달된 그 책은 아마도 하멜하우스에 전시되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 소설이 화란어나 영어로 번역이 돼서 네덜란드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많이 읽을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가는 당시 바깥세상에 깜깜한 조선이 우연히 표류해온 서양인들을 잘 활용하여 군사기술을 포함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세상을 향해 적극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고자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 자신도 하멜 표류기를 다시 보면서 당시 우리 조정이 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친절을 베푼 것 외에는 대체로 무책임하게 대한 것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이 당시 세상 물정에 대해 어둡고 무지하였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멜과 그 일행으로서는 선박이 조난을 당해 낯선 곳으로 표류한 것만으로도 큰 불운인데 표류지에서 13년 간이나 억류되어 열악한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은 이중 삼중의 불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하멜 일행 표류 당시의 제주 목사 이원진(1594~1665)은 표류인들을 심문하면서 이들에게 상당한 동정심을 발휘하고 이들을 돌려보낼 가능성도 암시한 것으로 표류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朝廷)은 인도주의에 호소한 이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법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을 귀환시키지 않겠다고 밝힙니다. 하멜이 탈출한 후 나가사키에서 일본 관리의 심문에 답하면서 "국왕과 조정 대신들에게 여러 번 (송환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자기 나라 사정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고 늘 대답했습니다"고 답합니다.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들보다 훨씬 이전에 표류하여 조선에 들어온 박연(Jan Janes Weltevree)이란 사람도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훈련도감에 두면서 결혼까지 시켜 조선에 살도록 해오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 당시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라서 청나라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돼 있을 때였습니다. 조정으로서는 이 외국인들이 무슨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이들 또한 훈련도감에 배치해 놓았지만 이들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아가 청나라 사신이 자주 드나들어서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극도의 신경을 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 사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알림으로써 도움을 받을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 하멜 일행 중 일부는 길에서 일부러 청나라 사신 앞에 나아가 고국 귀환을 호소하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벌을 받고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결국 조정은 청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강진으로 이송하였으며 이들은 거기서도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합니다. 나중에 이들은 다시 전라우수영이 있는 여수와, 순천, 남원 등지로 이송되었습니다. 억류 13년 동안 이들은 특별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주로 조선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고관의 잔치나 일반인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저는 두 가지로 당시 우리 측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난파해서 표류해온 외국인에 대해 왜 인도주의적 배려를 하지 않았던가 하는 것입니다. 일행 중에는 13세 소년도 있었습니다. 심문에서 일행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바다 가운데서 갑자기 나쁜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여기에서 부서졌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되어 고향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밤낮으로 하느님께 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을 살려서 일본으로 보내주시면 우리나라 상선이 꼭 많이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편에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이익태 목사의 문집 지영록/知瀛錄 별첨, 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 만약 우리 조정이 이들을 억류하지 않고 배를 내어 보내 주면서 다시 오도록 권유하였더라면 어쩌면 우리의 개국이 일본에 크게 뒤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둘째 이들의 기술을 활용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선박이나 무기 생산을 도모할 수 있었으면 국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아마도 청국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일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350여 년 전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좋은 기회를 놓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멜 일행에게 불운을 안겨 주면서 바깥세상에 문을 닫고 지내기로 한 조정의 태도는 곧 국운이 쇠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멜 일행은 탈출하여 귀국함으로써 그들의 불운을 극복하였지만 우리는 계속 쇄국으로 나가다가 종당에는 국권의 상실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지난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 먼젓번 칼럼에서 소개한 제주목사 이익태(1633~1703)의 문집 지영록은 하멜 일행의 최초 표착 지점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심문한 기록도 첨부하고 있습니다.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할 당시의 제주 목사는 이원진 목사였는데 그는 임기가 되어 서울로 돌아가고 그 다음다음 후임자로 이익태 목사가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임 중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일에 관한 기록을 찾아서 자신의 문집에 자세히 실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 기록을 문집에 싣지 않았더라면 중요한 우리 역사의 기록이 멸실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내외경제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