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경제TV 칼럼] 최근 들어 순발력이 둔해져 걱정입니다. 나이가 있으니 육체적 순발력이 전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뇌의 순발력이 스스로 놀랄 정도로 둔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이름이나 먼 외국 지명을 들을 때 뇌의 지각반응이 신통치 않습니다.

자주 왕래하는 친구이거나 가까운 친척이 아닌 사람의 이름 또는 평소 회화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명이 아닌 경우, 그것이 죽각 뇌의 지각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누구인지 또는 어디 있는 곳인지 뚜렷한 생각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한참 생각해도 전연 뇌 반응을 얻지 못하여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평소 우려하는 치매 증상의 초기 징조가 아닌지 걱정 됩니다. 물론 사람의 기억력이 언제나 젊었을 때와 같을 수는 없겠지요. 어릴 때는 잘 기억하면서 최근에 있었던 일은 생각해 내지 못 하는 것을 보고, 사람의 뇌 기억력을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저장기능에 비하는 분이 있습니다. 뇌의 기억저장 능력에도 한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론입니다.

그렇다면, 제발 과거의 필요없는 기억은 컴퓨터에서처럼 삭제하고 새로운 기억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사실 지우고 싶은 과거 기억은 무수히 많습니다. 남기고 싶지 않은 기억은, 저처럼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당시는 학교에서 왜 그렇게 암송해야 할 사항이 많았는지요. 125명이나 되는 역대 일황 이름부터 시작하여, 매일 있는 조회나 각종 모임에서 꼭 암송해야 하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그밖에 '교육칙어(勅語)' 또는 '기미가요' '우미유카바' 등 일본국가나 군가 등이 그것입니다. 일본어로 된 고등학교 교가(校歌) 가사는 지금도 기억하며, 군에 입대하는 사람을 환송할 때 부르는 군가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 쓸모없는 이런 기억들을 지워 뇌의 기억력 증강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대의학으로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일본의 어느 치매 환자 요양소에서 기억력을 거의 잃은 할머니가 초등학교 교가는 3절까지 불렀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일제 때 유년시절을 한국 시골에서 보내고, 중학 1년생인 14살 때 평양에서 일본 패전을 맞아 소련 점령군 하에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구사일생으로 개성과 인천을 거쳐 귀국한 일본 중견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 씨는 학교에서 배운 꽤 긴 '군인칙유(軍人勅諭)' 무선통신에 쓰는 모르스 신호(Morse Code)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어, 새 지식을 저장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농담 섞인 걱정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전라남도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파출소 순경과 자기 가족을 빼고는 마을 근처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 전연 없어, 생전 처음 배운 한국 노래 '아리랑'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당시를 회고하는 책에 썼습니다.

뇌 반응이 둔해짐과 더불어 젊을 때의 치밀성과 사물판단의 정확도가 크게 떨어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두 달 전 일본 아베 정권과 학교재단 사이의 비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사학재단의 이름을 잘못 썼다가 발표 직전에 회원의 지적으로 정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자유칼럼 소풍 행선지 경주를 전주로 착각하고 있다가 회원의 적시 지적으로 봉변을 면했습니다. 아이들이 긴 버스 여행은 무리이니 KTX편으로 가라고 표를 구하기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팔순의 고령에 국사를 다루다가 역사에 오점(汚點)을 남겼습니다만, 저는 아무런 무거운 짐은 없으니 그런 점에서는 천만다행입니다. 매일 새벽 눈을 뜨며 "오늘도 무사하게"라고 기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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